이 책의 1부와 2부는 그 많은 페이지에 걸쳐 오리엔탈리즘의 개념 정의와 발전 과정에 대해 다루었다. 사실 3부 전까지는 상당히 어렵고 지루했으나 오리엔탈리즘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지식’이란 개념 및 연구의 발전 과정과 윤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이 생겨나고 연구되던 그 시절 사람들에게 동양이란 무엇이 되었든 그들에게 알려진 것이 곧 지식이었을 것이다. 동양은 타락했다, 순수하다, 저급의 종교가 세력을 장악하고있다, 동양인은 정복될 필요가 있다 등의 아이디어는 어찌됐든 간에 서양의 동양학자들이 관찰한 결과이며 나름의 사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식인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유효한데, 그 예시 중의 하나로는 기아와 전쟁을 내세워 자극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된 아프리카의 이미지에 어찌 말하면 세뇌 당해 아프리카에 있는 수많은 국가의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역사적 등등 수많은 개별성을 '아프리카'로 퉁치고 단순히 가난하고 위험해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 있다.)
이 책의 거의 30%는 사람 이름이었던 것 같다. 매 페이지마다 상당한 수의 학자, 작가, 예술가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학문에 관한 책이다 보니 학자는 그렇다 치고 예술가들이 자주 언급된 것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단테, 위고, 모짜르트 등의 예술가나 작가들이 자주 언급되었는데 그들의 작품에서 동양 및 이슬람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그 때의 사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을 신비롭고 기괴하고 아름답다는 등으로 묘사해 읽는 이로서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예술 작품에서는 무엇이 어떤 식으로 묘사되고 있을까? 나는 몇 세기가 지났음에도 과거와 달라진 점은 크게 없다고 생각한다. 타 지역에 대해 일방적인 묘사가 그저 세계화로 인해 더 많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한국도 이것에 있어서는 전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나는 서양과 동양의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자란 세계지도를 보면 한국은 동쪽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 우리가 동양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빠는 한국은 심지어 아시아 끝에 있어서 극동이라고 까지 불린다고 했다. 10살도 안 된 나이였을 뿐이지만 나는 왠지 모를 불쾌함을 느꼈다. 지도 가장자리까지 밀려난 꼭 부수적인 지역의 취급을 받는 것 같았던 것 같다. 나는 한국을 떠나 산지 5년 째가 되어가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내가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는 게 상당히 꺼려진다. 5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에 대한 소속감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어떤 선입견을 가지거나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양이란 사실상 유럽인의 머리 속에서 조작된 것이며 그들에게 이국적인 존재 및 체험의 장소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향해 느낀 대립감으로 그들 나름으로 열등과 우열, 동양 특유의 특징 등 서양과 동양을 계속해서 나누어 비교하다 보니 세기에 걸쳐 개념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진한 구분선이 그어진 것이라고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실로 일방적인 개념인 것이다. 소위 아랍권 국가들은 아직도 유럽을 기준으로 지어진 중동이라고 불리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중동이란 말 대신 서유럽, 북유럽,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와 같이 그 나라가 해당한 대륙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떨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런 관점에서만 보면 다른 나라나 문화권에는 발을 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고 심지어는 비인도적 침략의 역사를 근거로 세계화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한국처럼 (사실 지금도 한국은 굉장히 자문화 중심적이고 폐쇄적이라고 생각) 외국과 단절하는 것 보다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배우고 소통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발전에 좋다고 생각한다. 계속 한 환경에서만 안주하는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 그 자체라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세상에 대해 배우고 진출하는 방법과 의도가 잘못 되어 왔다. 동물원을 방문하는 듯한 탐험, 현존하는 문화를 완전히 짓밟는 개척, 자립 능력을 무시하고 의존을 높이는 동정에 의한 도움의 대상이 아니라 동등하게 주고 받으며 존중하고 공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개념의 시초는 유럽이며 학자 대부분이 서양인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객관성을 위해서도 관점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문제의 해당자들만 그 문제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오리엔탈리즘에 방법론적 결함이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책인 만큼 서양에 의해 대상화된 동양만 다루어졌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양이 서양에 가지는 환상 및 편견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끝이 없다.
요즘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매체를 통해 디테일한 사실관계나 전후배경 없이 극단적으로 세상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된다. 이는 세상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반면 자칫 편향적 사고를 가지게 하거나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에도 실질적인 변화는 없이 불안감만 조성할 수 있다. 편을 가르고 문제 해결보다는 분노만 일으키는 것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검토하며 옳고 그름을 논하는 책을 읽으니 신선했던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어려운 문체로 담겨있는 몇 십년이 지난 상당히 오래된 책인 데다 비판적으로 읽고자 했기 때문에 읽는데도 오래 걸리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뒤로 갈 수록 에드워드 사이드가 쓰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으며 나는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었기 때문에 역자의 해설 코멘터리와 한국 문맥에서의 역자의 해설도 함께 읽을 수 있었던 점이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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