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여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거쳐 평등에 도달한다. 정의란 이렇듯 다양한 이론의 지지자들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정의의 사전적 정의는 ‘just behavior or treatment, the quality of being fair and reasonable’ 등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being fair and reasonable한 것이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공리주의에서 자유주의적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두 가지 입장 모두 모순 또는 결함 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의 경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값을 끌어내기 위해 다소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어느 한 쪽에 이익이 좀 치우치더라도 결과적으로 총 이익이 더 크기만 하다면 평등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복에 관한 견해는 개인마다 달라 공리는 정의와 권리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적합한 예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더 많은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교육 방식은 한 교실에 많은 학생들을 편성하고 학급의 평균을 높여주는 소위 똑똑한 학생들은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이러한 학습 방법이 맞지 않아 학습 효율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을 방해하는 문제아로 취급된다. 핀란드를 비롯해 다양한 나라의 교육들이 이러한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하는 중이다. 자유주의는 안타깝기 짝이 없게도 많은 사람들이 빠지고 있는 착각의 늪이다. 이름에서 보이듯 마치 자유주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자유를 잘 보장하는 것 처럼 들린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유의 수혜자는 소수일 뿐이며 그로 인해 다수의 취약계층의 자유는 도리어 박탈당한다. 하나의 예로, 자유가 중요하니까 대기업이 환경적 인권적 결과를 무시한 채 개발을 한다면 이는 기후 변화와 노동 착취의 피해를 입는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할 자유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세계적으로 힘있는 계층을 등에 업고 신자유주의 정치체제가 기세를 잡아가고 있으며 이는 굉장히 근시안적이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작가가 지향하는 공동체주의가 공존의 사회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눈에 띄는 극적인 이익이 없고, 부유한 사람 입장에선 내 것을 빼앗아 다른 이에게 준다는 생각에, 중산층에선 나 살기도 힘든데 나눌 게 뭐가 있냐며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하지 않는다. 나이 많은 세대에서는 과거의 공산주의를 연상하며 무턱대고 싫어한다. 하지만 특히 기후위기로 누구의 미래도 보장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모두 함께 잘 사는 협력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또, equity를 추구하는 것이 정의에 가장 가까운 길이며 우리는 이 것은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그만큼 끌어올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작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두에게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준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다면 그 경기는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누군가는 많은 교육의 기회와 사회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환경 덕에 경기에 많은 도움을 받고, 누군가는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기 어려워 경기의 룰도 잘 모른다면 빈부격차만 심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이 때 우리는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장벽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점에서 나는 공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책에는 징용에 대한 파트가 있었다. 징병제에는 국가와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의견과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적어도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이 부분에서 사실 그렇게 치면 교육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교육은 좋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아닌가? 아무도 이를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좁은 공간에서 정해진 것을 배우며 경쟁하고 시험 받고 원하는 때에 화장실도 못 가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또, 성공한 삶에는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전통적인 ‘성적을 잘 받아 돈 많이 버는 직장을 가지는 것’ 이외에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와 같은 이유들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수 공교육의 중요성을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학교 교육에 큰 실망을 하고 탈학교와 대안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금 시스템에서는 이 또한 교육의 불평등에서는 벗어날 수는 없으며 차라리 공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을 다시 한 참이다. 공교육이 제대로 이루어 졌을 때에는 교육이 이전 문단에서 언급한 ‘경기’를 모두가 조금이나마 더 공평하게 치룰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소득 격차를 줄이고 사회 계층을 조금 더 유동적으로 만들어 준다.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런 이유로 교육을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칸트의 목적론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론 중 하나이다. 인간의 삶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의 목적이 됨으로써 자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남이나 다른 무언가의 수단이 되어 사는 것보다 더욱 Resilient하고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 이상으로 교육에 의미를 더한다. 우리는 학생들을 미래의 주인공, 미래의 일꾼이라고 부르며 학생들을 실제로 그렇게 만들기 위한 교육을 구성한다. 이것은 학생들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데에 그쳐 개인의 다양성과 holistic 발달의 잠재력을 간과한다. 학생들은 미래의 무언 가가 아닌 지금 그대로 존중 받고 행복하게 그들 스스로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며 자란 학생들이 미래에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교육은 조화롭고 발전하는 사회를 위해 하는 것도 맞지만 궁극적으로 교육은 학생을 위한 일이며 그들이 자신의 그렇게 해야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본인 삶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학생들을 진정으로 미래의 주인공으로 키우고자 한다 해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틀에 박힌 방식으로 준비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며 어차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유연한 사고방식과 resilient하고 정의로운 마인드를 가진 well-rounded 시민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아무튼 이 책에서 만큼은 칸트가 하는 말의 대부분에 동의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칸트랑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공감능력이 0일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가 2년 전에 읽기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책이다. 그 때는 이 책의 다양한 이론들과 철학적인 개념들이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3년간 이런 주제의 책을 읽고 수업을 들은 뒤 지금 다시 읽으니 훨씬 수월했고 다양한 생각할 거리들과 이를 교육의 관점과 접목시키며 읽는 것이 재미있었다. Equality와 equity의 차이에 대해서는 우리 프로그램의 첫 학기부터 배운 바 있다. 이 책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정의에 대해 다루었기에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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