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학년 2학기에 들은 교육 철학과 윤리 수업 마지막 과제로 쓴 글인데 이번에 논문을 쓰면서 다시 들여다 보게 되었다. 지금 보면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상당히 감정적으로 쓴 글인 것 같지만 이것도 아까워서 한국어로 재번역하고 좀 더 다듬어서 올린당. 일일이 번역하기 귀찮아서 구글번역 돌리고 조금만 고친거라 한국어가 이상할 수도 있음. 매 수업 주제마다 엔트리를 작성하는 것이 과제였는데 그것들을 모두 합쳐서 정리하면서 몇 가지 책 중에 골라서 읽고 그 내용을 덧붙여서 하나의 윤리적 주제에 대해 에세이를 쓰는 것이 마지막 과제였다. 나는 Freire의 pedagogy of the oppressed를 읽고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로 이 에세이를 썼다.
교육은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믿기 때문에 인종차별도 교육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교육이 개인적, 제도적, 문화적 이렇게 세 가지 형태의 인종차별을 모두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교육제도의 변화는 곧 제도의 변화이므로 개인의 행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개인들의 집합체로서의 문화도 결국에는 변할 것이다. 그러기 위한 이 담론에서 상호문화 교육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프레이리의 pedagogy of the oppressed(1970, 1993)와 관련하여 인종주의와 상호문화 교육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이 책은 감정적이고 어렵고 추상적이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내가 이 수업의 과제 중 하나였던 인종차별 엔트리에서 나는 당시 내가 아는 한 최선을 다해 인종차별을 묘사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체계적 인종차별과 증오에 기반한 인종차별이라는 두 가지 큰 덩어리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레드 라이닝과 같은 인종 차별 시스템으로 인해 원주민 및 아프리카 계 미국인에 대한 불평등이 있고, 증오에 기초한 인종차별에는 위구르인에 대한 탄압, 경찰의 만행, 미미한 공격,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기타 폭력이 포함될 수 있다고 말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주요국'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는 집단이 (국제)사회에서 배제되어 사회적, 정치적, 육체적 억압을 받는 '비인간화'의 이미지이다. 프레이리의 이 책은 출간된 지 50년이 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억압적 구조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 그러한 구조 중 하나다. 인종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이다 (A. Alemanji & A. Paradis, personal communication, 2021년 4월 23일, 30일). Freire는 그의 책에서 이러한 정치적, 교육적 계획이 실패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정책 입안자들이 recipients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특권적인 관점에서 계획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1970, p. 94). 이는 프레이리가 “억압자들은 억압할 “자유”를 잃을까봐 두려워한다”고 말한 부분에 해당된다 (1970, p. 46). 그가 50년 전에 지적했던 내용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인종 분리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레드 라이닝을 예로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미국에서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빈부격차 등 불평등이 발생하는 주요한 제도적 이유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유색인종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지만, 실제로는 체계적으로 이들을 낙후된 붉은 선 지역에 가두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탄압하는 데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통제의 자유를 잃는 것에 대한 억압자들의 두려움이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호문화교육 엔트리에서는 상호문화교육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에 대한 나의 이해가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했다. 나는 미래 사회가 어떻게 판단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에 대해 토론하고 질문할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썼다. 내가 개인적으로 내 민족적 문화를 받아드린 과정을 언급하며 이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관점에 대한 올바른 자세와 이해에 대해 가르치는 상호문화교육이라고 말이다. 한국과 핀란드의 상호문화교육(혹은 다문화교육)도 비교해 봤다. 한국은 용광로 이론처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한국 문화에 융합시켜 획일성을 만들기 위해 다문화 교육을 활용하는 반면, 핀란드 학교는 차이가 공존하고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지금 논문 주제가 이건데 지금 보면 핀란드도 다문화 교육에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 책에는 흥미롭게도 이런 맥락에 딱 맞는 문구가 있다. 프레이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은 단지 외부에서 온 이들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서 존재해 왔고, 그저 타인의 존재로서 인식되어 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에 대한 해결책은 그들을 통합하는 억압적인 구조보다는 그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계속 말한다 (1970, p. 74). 나는 이것을 상호문화교육의 맥락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차별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문화의 색깔을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대로 허용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수업을 듣고 동기들과 몇 차례 토의한 후에 특히 인종차별에 대한 내 생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인종차별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제는 인종 차별이 단지 한 국가 내에서의 사회적 낙인과 불평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수록 나는 더욱 무지하고 비관적인 느낌이 든다. 위구르족 인종 청소와 우크라이나 및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극도로 비인도적이다. 그리고 미얀마에서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다 700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보다 사망자 수가 적었던 파리나 맨체스터 같은 서구 국가에서 테러 공격이 일어났을 때보다 국제적인 인식도 애도의 목소리도 적다. 물론, 사망자 수에 따라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는 단지 관심과 애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러한 무관심 때문에 다른 나라로부터의 지원도 부족하는 점은 중요하다. 국제적 지원이 있었다면 이러한 사건을 예방했거나 적어도 이렇게 치명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남수단의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은 미국 기독교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아 독립할 수 있었다 (Bereketeab & Nordiska Afrikainstitutet, 2012, p. 21). 반면 이슬람 국가인 소말릴란드의 독립은 아직 국제사회와 유엔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프레이리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의 발언권을 부정하는 사람과 발언권을 박탈당한 사람 사이에는 dialogue(대화라고 번역하겠음)가 있을 수 없다 (1970, p. 88). 즉,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우리가 말하는 평등의 의미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말할 수 없거나,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공정한 공존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평등을 바라는 세계시민은 결코 현 사회처럼 편향되고 편협하게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프레이리에 따르면, 대화적 행동과 혁명적 행동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으며 오히려 혁명적 행동의 본질은 대화 있다 (1970, p. 135). 나는 이것을 좋은 대화가 거의 혁명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이해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말에는 반성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를 버리는 것은 다른 하나를 손상시킨다고 프레이리는 말한다 (Freire, 1970, p. 87). 즉,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Freire, 1970, p. 87). 이를 보면 프레이리가 dialogue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비록 이 책은 인종차별과 문화간 교육에 관한 직접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그의 교육학은 확실히 이를 학교 교육으로 구현하는 데 영감을 줄 수 있었다. 이는 비판적 사고에 대한 그의 정의와 관련하여 특히 인정할만 하다.
이 책에서 프레이리는 비판적 사고와 문제제기 교육(problem-posing education)을 강조한다. 나는 이 둘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교육과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교육학을 연결시킬 때 기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단락에서는 프레이리가 그의 책에서 제안한 교수법 중 세 가지를 가져왔는데 다음과 같다.
프레이리는 비판적 사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계와 사람들 사이의 불가분의 연대를 식별하고 그들 사이에 이분법을 인정하지 않는 사고 - 현실을 정적인 실체가 아닌 과정, 변화로 인식하는 사고 - 행동에서 분리되지 않고 관련된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시간성에 몰두하는 사고” (Freire, 1970, p.92)
보다시피 사람 사이에는 이분법이 없고 현실(혹은 사회)은 변할 수 있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문화간 교육에서 추구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문제제기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지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지식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탐구심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Freire, 1970, p. 72). 문제제기 교육은 더 높은 수준의 지식(logos)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현상을 인지하고 창의성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노력하게 한다. 현재 우리 교육은 매우 소극적이며, 특히 다문화교육과 반인종주의교육(antiracism education)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제기 교육이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문해교육은 구조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개혁하는 과정이다 (Freire, 1970). 교육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판의식의 각성이 시작되는 만큼, 문해력의 정치적 변혁적 측면 없이 언어교육을 단지 읽기와 쓰기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Freire, as quoted in Shim & Nam, 2002). 핀란드에서는 교사들의 정치 참여가 허용되고 실제로도 활발하나 반대로 한국에서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의무이며 정치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치이고, 따라서 피하려 하기보다 올바른 방식으로 정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이 건강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교육학과 Zembylas의 보다 상세한 수업 방식을 결합하는 것이 적절한 문화 간 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Freire와 마찬가지로 Jansen과 Zembylas는 비판 이론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하고자 한다(Jansen, 2009 as cited in Zembylas, 2012). 프레이리와 Zembylas는 둘 다 개인적 및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사회적 관습과 지배적 신념에 도전하기 위해 안전지대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Leibowitz et al. 2010, as quoted in Zembylas, 2012). 반인종주의 교육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Zembylas는 인종차별주의자를 직접 상대하기보다는 감정이 넘치고 토론이 가능한 환경에서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를 강화함으로써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12).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프레이리는 토론의 중요성, 즉 그의 말대로 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다. 심석남은 5가지 주요 전제를 요약했는데 이를 더욱 짧게 요약하면, 대화가 박탈된 개인은 억압을 받고 있으며, 대화에 참여함으로써 해방된다 (Freire as cited in Shim & Nam, 2002).
그러나 이는 특권층이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이러한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양측 모두에게 진정한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사회에 대한 더 나은 견해와 이해를 함께 구축하여 궁극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해야한다 (Freire, 1970, p. 93).
그러나 위에서 네 번째 문단에 이어서 이야기 하자면, 우리는 비서구 국가에서 일어나는 갈등, 기근, 식민지화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다고 해도 국경 밖에서 일어나는 이상, 국내처럼 연대하기는 어렵고, 개인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치도 적다.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국경으로 나누어진 개별 국가가 아닌 지구 전체를 하나의 국제사회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국제 차원에서도 인종차별을 고려해야 할 때이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는데,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지 알고 싶다. 열린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나에게 의문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 『페다고지,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학』에서 발견한 희망적인 문구를 인용하며 이 에세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Recognizing that History is time filled with possibility and not inexorably determined that the future is problematic and not already decided, fatalistically." (Freire, 1970,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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